“회개한 삭개오”20221030중앙루터교회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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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삭개오/종교개혁기념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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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삭개오”20221030중앙루터교회예배설교
본문: 눅 19:1-10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삭개오의 이름>
이름엔 뜻이 있지요. 제 이름은 ‘진수’인데,
한자로 ‘참진’에 ‘물가수’자를 씁니다.
‘사람들을 살리는 생수같은 존재가 되라’고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불혹의 나이를 지나 보내는 요즘,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 좋은 이름대로 살고 있는지,
제 자신에게 되물어 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삭개오’ 또한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순수한’, ‘의로운’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직업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세리’였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세무 공무원’입니다.
물론 ‘세무 공무원’은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국민의 복지와 나랏일을 위해, 정당하게 세금을 걷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세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매국노’ 혹은
‘부당한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로 간주되었습니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함께 살펴봅시다.
<세리 삭개오>
오늘은 ‘성령강림일 후 스물 한째 주일’인 동시에
‘종교개혁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 당시 마인츠의 대주교는 ‘알브레히트’였습니다.
‘알브레히트’는 교황에게 뇌물을 주고, 주교직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성직매매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이 뇌물을 조달하기 위해 ‘푸거가문’에게 막대한 돈을 빌렸습니다.
주교가 된 ‘알브레히트’는 그 빚을 갚아야만 했지요.
그는 빚을 갚으려고 코흘리개 아이들의 주머니까지 털어갔습니다.
교황과 손을 잡고 성인들은 물론 이거니와
아이들에게도 면죄부를 판매한 것입니다.
영혼을 옳은 길로 이끌어야 할 주교가, 많은 이들의 영혼과 돈을 강탈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시대에 ‘세리’가 되기 위해서는
‘알브레히트 처럼’ 돈을 빌려 ‘직’을 사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뇌물로 세리가 된 자들은 이 빚을 갚기 위해,
빌린 원금 뿐만아니라 거기에 이자까지 더해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고 합니다.
또 다른 특이점은 당시 지배층인 로마는, 식민지 백성을 세리로 선발하고,
따로 급료를 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로마는 세리들에게 각 지역에서 세를 거둘 권리만 주고,
로마에게 바칠 세금 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큰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세리가 스스로 급여를 책정하게 만든 것입니다. 세리가 자신의 급여를 높게 책정하면 할 수록,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이쯤에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냈어야 할 세금을 한번 계산해 봅시다.
지역에서 로마에게 바칠 세금 더하기,
세리가 직을 사기 위해 빌린 원금과 이자 더하기,
세리가 셀프로 책정한 급여를 다 더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내야 할 세금이었습니다.
이렇게 과도한 세금을 물어야 하는 백성들 입장에선
세리는 좋아 할래야 좋아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어쩌면 로마보다 더 싫은 존재가 ‘세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동족의 등골을 빼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정황이 누가복음 3:12-13절에 잘 나타납니다.
함께 찾아 읽어봅시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눅 3:12-13).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받기 위해 광야로 나온 ‘세리들’에게 한 말입니다.
요한은 과도한 세금으로 백성들을 힘들게 했던 세리들에게 단호하게 요구합니다.
“너희가 세례 받기를 원한다면 ‘정해진 세금 이상을 받지 말아라’”라고 말입니다.
본문 7절에도 사람들이 세리를 어떻게 여겼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제가 7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눅 19:7).
사람들은 삭개오 집에 들어간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 집에 들어간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삭개오는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18:17절에도 사람들이 ‘세리’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드러납니다.
함께 찾아 읽어봅시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에 피해를 끼친 자가
여러 번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 처럼 여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세리’라는 단어는 ‘절대 피해야 할 사람’,
‘뉘우칠 기회도 주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즉, 유대인들에게 ‘세리’라는 이 두 글자는,
‘죄인’, ‘상종하면 안 되는 자’, ‘매국노’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나마 세관에 앉아 있다가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된 마태는 ‘일반 세리’였지만,
삭개오는 ‘세리장’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따라서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미움을 샀습니다.
이 처럼 자기 이름 값을 못하며 살던 사람이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세리 삭개오의 기도>
사람들에게 미움받던 삭개오는 예수님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본문 3절은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두 가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첫 번째 장애물은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선 수많은 인파를 헤집고 나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죄인 삭개오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갈 자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질타와 따가운 시선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장애물은 ‘그의 키가 작았다’는 점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예수님 시대 당시, 성인 남자의
평균 키는 152.4cm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삭개오의 키는 분명 150센치 보다 더 작았을 것입니다.
그가 까치발을 하더라도, 그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묵상하다보니 삭개오의 진짜 문제는
수 많은 인파나 작은 키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고, 그의 키가 작았을 지라도,
삭개오가 자신의 이름처럼 순수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면
사람들은 그를 위해 길을 내주었을 겁니다.
삭개오의 진짜 문제는 자신의 작은 키 만큼이나
‘존재가 작은 사람’이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다시말해 문제는 사람들에게 삭개오가 ‘죄인’이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무 위에 홀로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삭개오가 홀로 나무에 오르며
지난 주 본문이었던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세리의 기도’를 드렸을 것 같습니다.
제 말이 그럴듯한 이야기인지, 아닌지
누가복음 18:13절에 등장하는 ‘세리의 기도’를 찾아 함께 읽어봅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위 기도의 주인공과 삭개오는 닮은 점이 많습니다.
우선 18장 기도의 주인공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삭개오도 역시 ‘세리’였지요.
또 18장 기도엔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는 죄 때문에 부끄러워 하늘을 쳐다볼 수도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세리 삭개오도 같은 처지였지요.
민족의 반역자인 그는, 그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한
이 기도가 ‘삭개오의 기도’ 같습니다.
우리도 잎새에 이는 바람 하나에 자신이 부끄러워 질 때가 있습니다.
삭개오 처럼 우리 또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럴때마다 우리 모두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가슴을 쳤던 이 ‘세리의 기도’를 기억합시다.
우리가 가슴을 치며 회개할 때
‘세리의 친구’요. ‘죄인들의 벗’(눅 7:34)되신 주님은 우리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아픔을 치료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벗이 되신 주님.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을 든든히 붙들길 소망합니다.
더불어 누가복음 9:48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등장합니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한번 보겠다고 체면까지 구겨가며 나무에 오른 ‘키 작은 삭개오’는,
어쩌면 위 말씀대로 ‘작은 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큰 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삭개오의 키는 작았지만,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과 마음에 영접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훗날 삭개오는 베드로에 의해 가이사랴의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존재가 작았던 삭개오가 이제 ‘다른 사람들을 품는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존재가 작은 자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으로 작은 자를, 예수님 닮은 큰 자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존재가 작은 우리도 예수님을 보기 위해 믿음의 뽕나무에 오르길 소망합니다.
나무에 오르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던 세리의 기도가
곧 우리의 기도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자 관리와 삭개오>
계속해서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삭개오 이야기가 앞서 18장의 ‘세리의 기도’와 연관되었듯,
누가복음 18장 18절에 등장하는 ‘부자 관리’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이 두 이야기는 주인공이 둘 다 부자였다는 점.
모두 “관리”였다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반면에 차이점도 있지요.
18장에 등장하는 부자 관리의 고백에 따르면 ‘자신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킨’ ‘자칭 의인’이었습니다.
반면, 삭개오는 자타공인 ‘죄인’으로 통했지요.
내용을 더 면밀히 살펴봅시다.
부자 관리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했다고 합니다.
그 후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부자가 가진 능력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곳에 모인 무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면 대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이에 대한 답을 우리는 ‘삭개오 이야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이 명령에 순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부자 관리처럼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 쪽으로 굽은 삶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틀기로 결단했습니다.
따라서, 삭개오 덕에, ‘부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이 생긴 겁니다.
혹시 이 자리에 부자가 계시다면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부자도 삭개오 처럼 구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의 결단>
본문 8절에는 삭개오가 자신의 관심을 어느 쪽으로 돌렸는지가 언급됩니다.
그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기로 결단합니다.
당시 랍비들은 수입의 오분의 일을 구제금으로 내도록 규정했습니다.
지금도 그렇듯 ‘오분의 일’은 꽤나 부담스러운 금액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소유의 반을 내겠다고 선언합니다.
삭개오의 이 결심은 랍비의 규정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삭개오는 부당이득을 취한 일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네 배로 보상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레위기 6:5에 보면 ‘부당 이득을 취했을 때’ 또한
원금의 ‘오분의 일’만 덧붙여 주면 족했습니다.
따라서 삭개오의 결심은 모세의 요구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의 ‘관심’은 ‘가난한 자’, ‘자신 때문에 상처받은 자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8절에 나타난 삭개오의 이 결단을 두고 성서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습니다. 바로 ‘시제’ 때문입니다. 8절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보시다시피 8절은 모두 ‘미래 시제’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시제를 고려해서 8절을 다시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과거 남을 속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도 했지만,
주님 만난 후부터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읽혀집니다.
즉, 예전 삶은 불의했지만, 이제부터는 잘 살아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견해가 다른 학자들은 위 본문의 시제를
‘현재완료진행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재완료진행형’은
“과거의 행동이 현재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을 때” 사용됩니다.
‘현재완료진행형’으로 본문을 다시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 됩니다.
‘삭개오는 이미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 왔었고’,
‘지금까지 속여 빼앗은 것에 대해서도 네배를 돌려주고 있었다’라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여리고에서 만나기 전에
이미 회개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도대체 삭개오는 언제 회개한 것일까요?
아까 누가복음 3장에서 세리들이 세례를 받으려고, 광야로 나왔었다고 했지요.
따라서 우리는 그 무리 중에 삭개오가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가능성에 따라 해석해 보면, 삭개오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한 삭개오는 예수님 보기를 간절히 기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예언한 ‘메시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메시아 예수’를 보기 위해, 나무 위에 올랐던 겁니다.
돌무화과나무에 오른 삭개오를 보고 예수님은 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예수님은 “삭개오 집에 유하겠다”라고 하셨고,
이에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신 집으로 “영접”합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 집에 유할 것’이라는 말 속에는
‘함께 식사하자’는 의미가 들어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하겠다’는 말 속에도
‘식사 대접하겠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종종 “밥 한번 먹어요~”라고 인사하지요.
이 인사엔 ‘나는 당신과 관계를 맺고 싶어요’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네 집에 유하겠다”라고 하신 말은
‘식사를 통해 삭개오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다’는 의미였습니다.
우리는 ‘한 집에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들’을 ‘식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와 함께 한 집에서 밥 먹는’ ‘식구’가 되길 바라셨던 겁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삭개오’는 더 이상 ‘식구’가 아니었습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죄인’이었습니다.
죄인인 세리는 함께 밥상에 앉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마지막절인 10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등장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사람들은 죄인을 식탁에서 배제했지만 주님의 식탁엔 차별과 배제가 없습니다.
그가 잃어버린 자 혹은 죄인일지라도 말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잃어버린 자와 죄인들에게 다가가 식구가 되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설교가 끝나면 우리도 성찬에 참여하게 됩니다.
주님은 성찬을 통해 ‘삭개오 같은 죄인인 우리’에게도
함께 밥상을 나누는 ‘식구’가 되자고 요청하십니다.
‘길을 잃었어도’, ‘죄인이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길을 잃었기에, 또 죄인이기에
우리는 더더욱 주님의 식탁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식탁에서 우리는 잃은 길을 찾고,
성찬을 통해 위로와 은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한 식구가 되자’는 주님의 이 세미한 음성이 들려지길 바랍니다.
성찬에 참여하며 ‘죄인을 용서하시는’ ‘위로’와 ‘은총’이
우리 안에 경험되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회개>
앞서 언급했듯,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의 신호탄으로 불리는 루터의 95개조 논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고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 하고 명하셨을 때에 그분은 신자의 전 생애가 참회하는 삶이 되기를 원하셨다.
이렇듯 종교개혁은 신자의 전 생애가 돌아서는 ‘회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회개’란 ‘자신에게만 집중되었던 관심’이 ‘타인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삭개오’는 회개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의 관심은 ‘가난한 자들’과 ‘자신 때문에 상처받은 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한 삭개오 이야기’를 들은 바로 오늘이 ‘회개하기 가장 좋은 날’입니다.
동시에 ‘종교개혁기념일’인 오늘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도 ‘삭개오 처럼 삶을 돌이켜 회개하는 자들이 되길’,
우리의 관심을 ‘다른 이들에게 두는 자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말씀을 붙들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이 모든 말씀 ‘자신만 생각했던 우리의 관심’을
‘이웃에게로 돌이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교회의 기도>
주님, 삭개오 처럼 우리도 죄인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세리의 친구’요. ‘죄인들의 벗’(눅 7:34)되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대합니다.
주님!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아픔을 치료해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옵소서!
키 작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과 마음에 영접하여 큰 자가 되었듯,
존재가 작은 우리도 주님 보시기에 큰 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작은 마음, 작은 생각이 자라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교회 안팎에 소외된 이들을 품는
넉넉한 그리스도인들 되도록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옵소서!
우리는 이제 성찬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성찬의 은사를 통해 주님과 우리가 새로운 식구임을 다시금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식탁에서 삶의 방향을 잃은 이들은 길을 찾고,
죄인들은 용서받는 은총을 맛보게 하옵소서.
‘삭개오’ 처럼 우리도 회개한 자가 되길 원합니다.
주님! 우리도 삭개오처럼 우리의 관심을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두길’ 원하오니
주님께서 자신만 생각했던, 우리의 관심을 돌이켜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주님께서 지금 상중에 있는 김수중 집사가정에 찾아가셔서
걱정과 불안 대신, 위로와 평안을 주시고,
고인이 되신 그의 어머니 최덕자 성도가 주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회개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위로와 용서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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